아산 UBF 가을특강/누가복음11:33-54
아산UBF 2016년 10월 16일 주일메시지
말씀 / 누가복음 11 : 33 - 54
요절 / 누가복음 11 :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IMF직후, 정부 출연 연구소나 기업 부설 연구소에서 구조조정할 때, 제일 먼저 정리해고 되는 사람들이 연구원 이었습니다. 연구원들은 기술과 연구에는 뛰어나지만, 자기 기술이 어떤 비중이 있는지 자기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사를 전달하는 기술도 부족하였습니다. 내부 관계가 부족하고 소통이 부족하다보니 존재감을 확보하지 못하였습니다. UBF
하나만 하고 있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내가 잘하는 것이 있다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거나 자기의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력도 좋고 사람들과 관계도 좋아야 합니다. 외부 협력자도 많아야 하고 내부 조력자도 많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 없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율법 읽고 암기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들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도 한 두 가지 자기의에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UBF
33절에서 36절을 보십시오. 방안을 밝히는 등불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방안이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합니다. 등불을 방안 높은 곳 중심되는 곳에 두어야 방안이 밝아집니다. 우리의 눈은 가시광선은 인식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시신경이 있는데, 막대세포와 원추세포가 있습니다. 막대세포는 색채를 인식하고 원추세포는 명암을 인식합니다. 우리가 보는 사물의 모습은 사물이 반사시킨 반사광입니다. 우리는 어두워지면 사물을 보지 못합니다. 사물이 반사시킬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 있거나 전기불이 켜져서 빛이 나야 사물들은 그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우리의 눈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광원이 있을 때 우리는 사물을 보고 인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눈이 사물을 볼 수 있어야 몸이 제대로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눈에 이상이 생겨서 빛을 인지하지 못하면 온 몸이 멀쩡하다고 해도 여러가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UBF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구약성경을 읽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입니다. 해가 떠 있는데도 눈이 건강하지 못하여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에 대한 말씀이 가득한데도 그들은 그 기록을 읽고 또 읽고 외우고 연구했으면서도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해가 떠 있어도 빛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처럼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영적 상태는 시각장애인과 같았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생명의 빛은 온 세상에 비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환한 빛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활 우리의 몸 구석구석을 밝게 하도록 우리의 영적인 눈, 마음의 눈이 건강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으나 이 말씀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과 나의 삶의 가장 중심, 가장 높고 귀한 곳에 두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환한 생명의 빛이 우리의 삶을 환하게 비출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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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청하였습니다.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식사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이 일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목자들인 이들이 철저히 굳어있는 자기의와 교만으로부터 깨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문제에 도전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정결”은 위생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생활의 정결의 예는 중요한 종교의식이었며 양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요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모세5경에 기록되어 있는 각종 정결율법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정결율법 조항들에 깊이 집착하고 확대하여 규례와 유전을 만들어 적용하고 실행하였습니다. 부정 하다고 규정된 돼기고지를 먹으면 인간 자체가 더러워져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식사 하면 더러운 마귀가 더러운 손에서 음식으로 옮겨가고 그 음식이 배로 들어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지옥에 떨어지게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었습니다. 나갔다 들어와도 손을 씻었고 부담스러운 물건을 짚었다 놓아도 손을 씻었습니다. 손을 씻고 식사를 했다가도 도중에 다른 음식으로 바꾸어 먹으면 그 때도 얼른 가서 손을 씻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과도하게 외적행위에 집착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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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겉만 깨끗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은 외적 행위에는 철저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일’을 비롯한 모든 율법과 전통과 규례의 사소한 규정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고자 애 썼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내면이었습니다. 이들은 연약한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나 긍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양들은 아예 상종 하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이 외적인 행위만 열심을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밖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속도 만드셨습니다. 내면은 더럽게 방치하고 외면만 번질번질하게 하는 것은 크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41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그 안에 있는 것이란 바리새인들이 반질 반질하게 닦아 놓은 그릇에 담긴 음식들입니다.
닦고 또 닦고 반짝거리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바리새인들에게는 가난한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긍휼과 사랑으로서 연약하고 불쌍한 양들을 도우라고 하십니다. 외적 행위만 거룩할 것이 아니라 내면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옷 입어야 진정으로 깨끗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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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기 의로 감당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원래 율법에는 곡물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만 언급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뜰에서 키우는 박하와 야생풀인 운향 그리고 모든 채소들의 십일조까지 드렸습니다. 율법 규정 이상의 십일조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금식도 율법 규정 이상 감당했습니다. 율법은 일 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금식하도록 규정했지만, 이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종교 행위로는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이고 열심히 십일조 생활을 하고 금식기도를 하였지만, 정작 마음에 공의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생활은 자기열심으로 감당하는 것 이었을 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무엇인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마음에는 자기의가 쌓여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행위가 바뀌는 것도 필요하지만, 마음 중심에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버리지 말아야 함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사무 처리도 공정하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양식 메모 열심히 해야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담아야 합니다. 일부 신자들이 교회 프로그램은 열심히 행하면서 삶은 편파적이었습니다. 교회 일 많이 하면서도 부당한 일 불합리한 일은 거리낌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부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입는 손해가 엄청나게 큽니다. 물론 본인도 열매가 없고 신앙생활이 괴롭습니다. 공의와 사랑을 버려서 그렇습니다. 열정 만큼 공의와 사랑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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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즐겼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회당에 왔을 때,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 많은 양들의 인사를 받는 것은 그들의 삶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너무 강하였습니다. 이들은 양들의 존경 받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이들은 인본주의자의 아부와 진심있는 존경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만 인정해주면 뭐든 다 좋았습니다. 이들은 비판과 비난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에 대한 부정적 표현이라면 뭐든지 극도로 민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삶이 평토장한 무덤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해 보이지만 그 속은 죽어 부패해가는 시체의 썩은 살과 악취로 가득한 무덤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하시자 이를 듣고 마음이 찔리는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율법사들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이들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사들은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 보는 일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인 본성을 숨기지 못하여 예수님 앞에 자기들은 안그런 척 항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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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남에게는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사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사들은 율법 조항들을 자꾸 만들어 내는 일에만 힘 썼습니다. 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저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과 구약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새로 찾아내고 개발해냈습니다. 백성들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경 선생들로 인하여 양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를 상실하고 내면이 답답해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양들에게는 이렇게 가르쳐 놓고 정작 자신은 그런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만 아는 예외 조항을 만들어서 자신들은 편하게 수월하게 율법생활 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이중적이고 교묘하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맡은 직분을 이용하여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율법에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하면 누구도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율법은 이렇게 봐야 한다고 하면 아무도 그들을 제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율법을 맡은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UBF
둘째, 복음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47-51절을 보십시오. 과거 특출한 사람의 무덤을 만들고 꾸미는 일은 유대교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으며 자기들이 그 선지자들을 본받고, 그들의 후계자들이라고 자처 했습니다. 하지만 죄에 빠진 조상들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다고 선지자들을 돌로 쳐죽이고 핍박 했듯이 지금 율법사들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한손으로는 옛적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으며 그들의 뜻을 기리는 척 하지만, 한 손으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고 무리들을 선동하여 공격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이들이 회개하기 어려운 것은 말씀을 인용해가며 합리화 하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기를 거절하며 끝내 죄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준엄하고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그들이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가인의 시기심으로 인해서 들에서 죽은 아벨의 피로 시작하여 역대하에 기록되어 있는 백성의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하다가 회개하기 싫어하는 자들에게 돌에 맞아서 성전에서 숨을 거둔 사가랴의 피까지 그 죄의 대가가 큰 심판으로 이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이 심판의 예언은 AD 67년부터 시작되는 유대전쟁에서 예루살렘에 이루어진 100만명 이상의 대학살로 성취 됩니다. 고의로 회개하지 않고, 말씀까지 자기 죄를 합리화하는 자들에게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무섭습니다. 우리는 심판이 이르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겸손히 회개하는 길이 살 길인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UBF
셋째, 자신들도 천국에 못들어가고 양들도 못들어 가게 했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 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사들은 성경말씀을 맡았습니다.
당시 성경은 구약 성경입니다. 구약 성경이 율법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과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가 언제 오실지 , 오셔서 그 백성들을 어떻게 섬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시야의 인격와 메시야의 사역과 메시야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구약에 기록된 바로 그 메시야가 오셨음을 얼마든지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성경대로 나사렛 사람이라 일컬음 받으셨고, 예수님 오시기 전 광야에서 엘리야의 심정으로 세례요한이 증언하였으며, 성경대로 문둥이가 예수님을 통하여 깨끗함을 받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저는 자들이 나음 받았습니다. 율법사들은 성경을 그렇게 연구하고서도 성경대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맡고도 성경대로 오신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는 율법사들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양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빨리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축복이 컸지만, 그 축복에 따르는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UBF
53,54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이런 지적을 받고도 양심을 속이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책망한 것은 이들의 회개를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목자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저주하실 마음이셨으면 이들이 그대로 심판 받도록 내버려 두면 그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인 이들이 다시 깨어나고 회개하여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기에 누구보다도 강하게 책망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책망받는 것이 기분 나빴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기회를 삼지 못하고 여러 백성들 앞에서 비난 당했다는 감정과 미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는 눈과 귀가 올바로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 친척으로 N대학에 들어온 어느 학생은 책을 읽지만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읽어라” 읽습니다. 글자 틀리지 않고 읽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냐?” 모릅니다. 다시 “읽어라” 틀리지 않고 또 읽습니다. “뭐라고 써있냐?” 방금 읽고도 모릅니다. 영화배우 톰 크루즈가 이런 증상을 보이는 난독증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뇌신경 이상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TV 많이 보고 게임 많이 하며 자란 학생들이 학습장애로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UBF
오늘날 우리의 캠퍼스는 영적인 난독증, 영적인 학습장애가 만연해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가정을 오픈하고 밥을 먹이고 기도해주고 말씀을 공부시켜주고 취직하도록 프로그램을 가르쳐주어도 그런가보다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기 인생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동도 느낌도 없습니다. 늘 자신을 섬겨주었던 자기 부모처럼, 늘 자신을 지도해주었던 여러 선생님들 처럼 다 저렇게 하는가 보다 생각하다가 지루하거나 힘들면 그냥 그만 둡니다. 세월이 오래 흘러서야 ‘인생의 목자’가 필요하구나 깨닫습니다.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는 더 오래 시간이 흘러야 깨닫습니다. 늦게라도 깨달으면 다행입니다. 못 깨닫고 죽어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의 기도는 중요합니다. 1시간 기도했다. 2시간 기도했다는 식의 기도의 총량이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영적 난독증을 보이는 우리 시대의 양들이 그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영접하도록 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건축자들이 쌓아올리는 거대한 건축물과 같이 높이 축적시켜서 자기의 영적 생활을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질게 마음먹고 결코 회개가 없는 이시대를 위하여 감당해야 하는 우리의 사랑의 의무입니다. UBF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의 귀를 열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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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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