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과정의

아산 UBF 가을특강/누가복음10:25-37

쌍용_성환 2016. 12. 12. 20:07

아산UBF 2016년 10월 9일 주일메시지 


이를 행하라 


말씀 : 누가복음10 : 25-37

요절 : 누가복음10 : 28


 오늘 말씀의 주제는 '진정한 이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웃'을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들은 아는 것은 많은데, 행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랑의 행함이 없으니 영생의 체험이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실천적 사랑을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실천적 사랑을 통하여 영생을 맛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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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행하라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옳은 사람인지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자기 질문에 대답을 잘 하시는지 시험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영생"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를 얻을 수 있는지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는 율법학자로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자기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므로 영생을 이미 얻어 놓은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대답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사는 계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십계명 중 제 1계명부터 4계명 까지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며 제 5계명부터 10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대답을 옳다 하셨습니다. UBF

 하지만 예수님께서 한가지 방향을 주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율법의 핵심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 외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지만, 아는 것에 비하여 행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아는 만큼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을 방향으로 주셨습니다. 행함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외면적 행동으로써 행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마음 중심에 둔 결과로써 행함 입니다. 


 그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사랑해야할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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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오랜 논란거리 였습니다. 음란하며 강포하고 부정한 돼지고기를 먹는 이방인들이 과연 이웃인가? 정통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상실한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의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문둥병자들을 이웃으로 봐야 하는가? 매국노 세리들과 더러운 창녀는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유대인들은 율법의 내용은 줄줄 외우며 훤히 꿰고 있었으나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전부 사랑할 이웃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율법사는 이웃 사랑 측면에서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과 핵심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율법사와 이론 논쟁을 벌이지 않으십니다. 행함이 없어서 마음이 찔리면서도 자신의 행함 없음을 포장하기 위하여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반문하는 율법사에게 교훈 대신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두 도시의 거리는 25킬로 정도 되는데 가는 길에 민가가 없어서 노상강도가 자주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돈만 빼앗을 뿐 아니라 신고하지 못하도록 심하게 때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고 옷까지 벗겨서 도망쳤습니다. 인적없는 길에 맞아서 죽을 지경에 이른 이 사람은 급히 구조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UBF

 이 길로 한 제사장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속하는 예물을 드리고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후다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가 지나간 후에 레위인이 뒤이어 나타났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 거하면서 제사장들을 도와 성전의 여러 가지 일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레위인도 강도만난 사람을 보자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레위인이 지나간 후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하는 중에 길에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원래 유대인들이 이방인보다 더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길에서 죽어가는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얼른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서 자신의 나귀에 태워서 가까운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날 때에는 주막 주인에게 추가로 두 데나리온까지 주며 더 돌보아줄 것을 부탁했고, 치료비가 더 들 경우 자기가 돌아와서 부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다시금 방향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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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누가 내 이웃인지, 어떤 사람이 사랑해야 할 사람인지, 규정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돼지고기를 먹고 생활이 불결하니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고, 사마리아인은 그런 이방인과 혼합 되었으니 이웃에서 탈락된 것이고, 세리는 동족이 힘들게 일한 것을 강탈해 가는 자들이니 이웃이라고 할 수 없고... 이러지 말고 자신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좋은 이웃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는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긴급한 구조가 필요한 사람을 그냥 두고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웃인가? 질문에 율법사도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풀면 사마리아인이라도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좋은 이웃인 것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율법을 완수해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율법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면 좋은 이웃이 아닌 것입니다. UBF

 또 배워야 할 것은 사랑의 실천에 비용이 소모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돕느라 돈이 들었습니다. 비싼 기름을 썼고 포도주를 썼습니다. 그를 업고 나귀에 태우고 주막에 눕히고 치료하느라 큰 수고가 필요하였습니다. 주막에 데려가 치료한다고 금새 벌떡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 낫기 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사랑 실천은 돈과 수고와 시간을 소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 없이 헌신 없이는 사랑은 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살려준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죄는 강도와 같이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를 때려 눕혔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상처받았습니다. 죄는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나의 귀한 보물인 거룩함, 긍정적인 생각, 희망, 부드러운 마음, 겸손, 감사, 찬양 이런 것들 모두 죄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죄가 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많은 댓가를 치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긴급히 구조가 필요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기꺼이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가장 비싼 그 목숨을 지불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율법사는 자신들이 강도만난 자와 같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자신들을 살리시는 분이심을 몰랐습니다. 자신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알지 못하기에 왜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사는 처음에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하였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비싼 댓가를 치러야 하고 큰 수고를 동반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사랑을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그럴 때 영생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영생도 없다는 것입니다. UBF

 마태복음 25 : 31~46절에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반대로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 했는가? 실천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영생과 관련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영생은 내세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는 복락과 희락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영원한 나라의 희락과 평안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예화속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 보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긴급히 구조하여 주었지만, 다친 사람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길을 떠났습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이 나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면 누군지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도 여전히 다 낫지 못하고 있다면 돈을 더 내주어야 합니다. 강도 당한 사람이 가진 것을 다 빼앗겼으니, 소비한 돈과 수고에 대한 보답은 바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보답으로 받은 것입니까? 

 누가복음 14장 13,1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사마리아 사람은 많은 수고와 돈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행하여야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행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만이 맛보는 보물이 가슴 가득 한 것입니다. 자비를 실천할 때 영생의 확신이 있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은혜가 임합니다. 

 영생은 움켜쥐는 자가 얻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형제를 위하여 기꺼이 쓰고 자신을 내어 줄 때 임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율법을 많이 아는 자가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대로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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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인생길에서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조우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때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사랑을 행하기 어려우며 진정한 이웃의 모습을 끝까지 지키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고 이 사랑을 기초로 할 때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해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고 섬기고 희생해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한계적 사랑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랑을 행하고자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캠퍼스 양들이야말로 강도만난 이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우리는 양들을 가장 먼저 돕고 양들을 가장 먼저 사랑할 대상이라고 배웠습니다. 일견 맞는 말입니다. 양보다 더 먼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우리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양들을 사랑하되 먼저 우리의 동역자들을 더 열심히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나사렛대학교에 있을 때, 백위열 총장님은 목자는 양보다 먼저 아내를 사랑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기초로 열심히 사랑하며 살고자 애써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영생을 맛보고 체험 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누구를 이웃으로 삼을지 결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영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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